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가정에 기반한 ‘주인-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은 경영학 교과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젠슨(Jensen)과 머클링(Meckling)이 1976년 논문에서 제시한 이 이론은 주주를 회사의 잔여청구권자(Residual Claimant)로 간주하며, 이사회와 경영진은 주주의 재무적 이익 극대화를 위해 대리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사회는 주주를 대신해 경영진을 관리·감독하며, 주주 가치 극대화(Shareholder Value Maximization)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이 접근은 법적·경영전략적·사회적 관점에서 여러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법적 관점에서 이 이론은 주식회사의 법인격 독립성을 간과한다. 살라몬 대 살라몬社 판례(1897)는 주식회사가 주주와 별개의 법적 주체라고 선언했으며, 이는 이사회와 경영진이 주주의 대리인이 아니라 법인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영국 회사법 2006 제172조는 이사회가 주주의 장기적 이익뿐만 아니라 직원, 고객,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주주 중심의 단순화된 접근은 이러한 법적 책임의 복잡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둘째, 경영전략적 관점에서 주인-대리인 이론은 단기 이익 추구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이 이론은 주로 주가 상승이나 배당금 증가와 같은 단기적 재무 성과에 초점을 맞추며, 경영진이 장기적 연구개발(R&D), 직원 복지, 지속 가능성 투자 등을 소홀히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0~90년대 미국 기업들은 주주 중심 경영의 영향으로 비용 절감과 주가 부양을 위한 구조조정, 대량 해고를 빈번히 단행했으며, 이는 장기적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셋째, 주주만을 우선시하는 접근은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소외시킨다. 기업의 가치 창출은 주주의 자본 투자뿐만 아니라 직원, 고객, 협력업체, 지역사회의 협력적 기여로 이루어진다. 주주 이익에만 치중하면 직원의 사기 저하로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협력업체와의 관계 악화로 공급망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원 복지를 무시한 기업은 이직률 증가로 인재 유출을 겪고, 고객 신뢰를 잃은 기업은 시장 점유율 하락을 초래한다.
넷째, 주주 중심 모델은 기업의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저해한다. 현대 경영에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요소가 중요해진 이유는 단기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이 환경 파괴나 사회적 비판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손실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대리인 이론은 이러한 복잡한 경영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지속 가능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기업의 평판 손상과 사회적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주인-대리인 이론은 법적 현실을 경제학적으로 단순화하며 주주 중심의 경영을 정당화했지만, 이는 단기 이익 추구, 이해관계자 소외, 지속 가능성 저해와 같은 문제를 초래했다. 따라서 현대 기업은 주주만을 위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균형 있게 고려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