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경영! 이해관계자 경영]
#7.이해관계자 경영의 실천!
존재적 실존양식과 리더십의 실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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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왜 썼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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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근대기술문명의 위대한 약속은 실패했다고 말했다. 근대기술문명은 자연의 지배와 그것을 통한 물질적 풍요,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 무한한 개인적 자유의 실현을 향해서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실패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더불어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과 그 약속도 실패했다고 말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착각에 빠졌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는 절대적 평등이라는 구호 아래 물질적 자산을 획일적으로 똑같이 분배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부정하게 되는 역설적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근대 기술문명,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가치는 왜 좌절되었는가? 그에 따르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인생의 목적은 욕망을 충족하는 것, 다시 말해 쾌락을 얻는 것이야 말로 사람이 사는 이유라는 잘못된 심리학적 전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위대한 스승(부처, 예수 등) 중에 쾌락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는가? 인생의 목적을 주관적인 욕망의 충족에서 찾는 쾌락주의는 17,18세기 부르주아 계급에 만연해 있던 사조로서 홉스나 라 메트리 그리고 사드와 같은 유물론자들에게 의해 주창되었다. 홉스는 행복이란 끊임없이 일어나는 탐욕을 지속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라 메트리는 행복감을 주는 것이라면 환각제 복용도 권장했다. 사디즘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된 사드는 남을 괴롭히는 잔인한 욕망도 존재한다면 그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행동은 정당하다고 말했다.
근대 기술문명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가치가 좌절된 두 번째 이유는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인간본성이라고 단언하면서 자기 중심주의와 소유욕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에서 전제하는 인간관은 이기적 인간관이다.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경제행위를 하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이기심과 탐욕추구가 정당화되면 인간 간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은 대립하게 된다. 인간 간의 대립은 갈등과 반목 그리고 전쟁으로 악화되고, 인간과 자연과의 대립은 환경파괴로 귀결된다. 즉 프롬은 현대 사회는 병들었으며,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심성구조의 변혁을 통해 지금의 난국을 돌파해야 함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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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한 삶과 존재하는 실존양식을 선택한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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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은 소유와 존재는 인간체험의 두 가지 형태라면서,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과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전적으로 소유적 삶을 살거나 전적으로 존재적 삶을 사는 사람은 아주 극단적이며, 대다수의 사람들 내면에 두 실존양식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두 실존양식 중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왜 인간은 두 가지 실존양식 중 하나를 선택하는가? 다시 말해 '~을 지향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이 물음에 대답해 보자.
인간과 동물은 무엇이 다른가? 동물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순응하면서 본능이 정해준 공식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동물에겐 의식도 없고 선택의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생물학적인 호흡을 할 뿐이다. 반면 인간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자신과 외적 조건을 의식하면서 삶의 방향과 태도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자신과 외적 조건을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능동적 존재이다. 즉, 인간에게 삶이란 정해진 운명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열린 가능성이며, 인간이란 존재는 이미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삶과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촉발하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 인간의 혼돈 속에는 비극적인 부조화가 존재한다. 한가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을 느끼거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물음에 사로 잡힌다. 인간은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고, 이데올로기나 사이비 종교 혹은 마약과 알코올로 도피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열정과 노력은 세계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며 광기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그러나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세상을 의식하는 존재! 인간이란 존재는 고독과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를 지향한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왜 불안을 느껴야 하는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고독과 불안에 휩싸인 인간 존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무엇에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이 질문들이 바로 삶의 목적과 목표를 정의하는 지향의 틀로서 작동한다. 즉 완전하지 못한 인간은 무엇을 지향하며, 그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무엇에 열정과 헌신을 쏟아붓는 행위를 통해 실존적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는가? 다시 말해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이 그것에서 탈출하기 위해 지향하는 삶의 실존 양식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프롬에 의하면 크게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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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방식이다. 이런 실존양식의 기저에는 쾌락주의가 존재한다. 인생의 목적은 인간적 욕망의 충족에 있다는 것으로서 17,18세기 부르주아 계급에 만연해 있던 사조로서 홉스나 라 메트리 그리고 사드와 같은 유물론자들에게 의해 주창되었다. 홉스는 행복이란 끊임없이 일어나는 탐욕을 지속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라 메트리는 행복감을 주는 것이라면 환각제 복용도 권장했다. 사디즘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된 사드는 남을 괴롭히는 잔인한 욕망도 존재한다면 그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행동은 정당하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한다.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소유적 실존양식은 인간의 생물학적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선 먹을 음식이 필요하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필요하고, 체온을 유지해 줄 옷이 필요하다. 프롬은 이런 소유를 기능적 소유라고 칭하면서 이런 소유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생물학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기능적 소유(합리적 소유)를 넘어서는 소유를 추구하는 행위가 문제라는 것이다. 프롬은 이런 잘못된 소유를 성격학적 소유라고 칭한다. 나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정신적 탐욕을 위한 소유라고 칭한다.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소유해야 되는 기능적 소유와 달리 정신적 탐욕을 위한 소유는 왜 문제가 되는가? 기능적 소유욕은 충족이 되면 더 이상 불필요한 소유를 욕망하지 않으나, 정신적 탐욕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다. 입을 통해 들어간 음식물이 나의 위를 가득 채운다. 그러면 더 이상 식탐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생존에 기반한 욕구는 육체적, 물리적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나 정신적 탐욕은 다르다. 그 탐욕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다. 무한대의 욕망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정신적 탐욕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신적 탐욕이 발생한 애초의 근본원인은 던져진 존재로서의 불안과 고독 때문인데,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탐욕의 대상이 인간을 향하면 갈등과 반목을 촉발하고, 자연을 향하면 환경파괴가 촉발된다. 요약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유적 실존을 선택하는 이유는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소유물 추구 욕망이 성격학적 소유, 혹은 정신적 탐욕을 위한 소유로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유욕을 충족하려는 이기적 욕망을 합리적 욕망으로 인정하며,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끊임없는 소비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매스 미디어는 욕망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수단이다. 막장 드라마에서는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등극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TV광고에서는 휘황찬란한 아파트와 억대의 자동차를 선전한다. 스포츠 연예신문에서는 몇십억 대의 부자가 된 스타 선수와 연예인들을 선전한다. 그들의 화려한 삶을 가십기사로 내보낸다. 일반 대중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극받는다. 그리고 그런 욕망 충족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심리적 위안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얻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하는 세 번째 이유는 육신의 불멸을 추구하는 영생 욕망 때문이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영생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 이후에도 자신을 보존할 수단을 찾는다. 대표적인 것이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행위다. 이런 행위를 통해 파라오들은 자신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롬에 의하면 역사책에 자신의 행위가 기록되기를 바라는 욕망도 영생 욕망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적 재산을 소유하려는 욕망도 영생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소유한 재산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증표로 생각한다면, 즉 자신의 정체성과 재산을 동일시한다면 그 재산(집, 토지, 주식, 자동차 등)이 영원하다면 그 사람 또한 영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해 대다수 사람들은 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한다. 프롬에 의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유적 실존양식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을 하고, 심지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실존양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소유적 실존양식은 유한한 생물학적 육체를 지닌 인간이 즉각적이고 감각적으로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고, 일시적으로나마 던져진 존재로서의 고독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에 선호된다. 소유의 한 형태인 소비는 존재적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결해준다. 그러다 보니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유적 실존양식을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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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하면 왜 문제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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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쾌락은 반드시 불쾌한 경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의 목적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인데, 쾌락을 경험하고 나면 반드시 불쾌를 경험하게 된다. 프롬은 말한다. ‘쾌락과 말초적 흥분은 절정을 넘어서면 비애의 감정을 남긴다. 흥분은 맛보았지만, 그릇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또한 프롬은 다음과 같은 속담도 언급한다. ‘성교 후의 모든 동물은 슬프다.’ 소유적 실존양식을 추구할 경우의 문제를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소유적 실존양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즉 재산과 이윤을 지향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권력에의 욕구와 권력에의 의존성을 낳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유물을 확장하거나 지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타인을 지배할 권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한 인간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하다는 데에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마틴 부버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관계의 방식이 존재한다. ‘나-너’와 ‘나-그것’의 관계가 그것이다. ‘나-너’의 관계는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하는 관계로서 쌍방향의 대화가 가능한 관계이다. 반면, ‘나-그것’의 관계는 타인을 수단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으로 타인은 지배와 복종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일방적인 지시만이 존재하는 관계이다. 소유적 실존양양식은 ‘나-그것’의 관계와 같다. 이런 관계양식엔 경쟁심, 적대감, 두려움이 존재한다.
셋째, 소유적 실존 양식을 선택하면 문제가 되는 세 번째 이유는 소유가 곧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소유물을 상실할 경우 그 사람 또한 절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실존양식을 선택한 사람은 소유물을 잃을까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그 사람과 소유물의 관계는 역전된다. 그 사람이 소유물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소유물에 지배당하는 역설적 관계가 촉발된다.
소유적 실존 양식이 왜 문제가 되는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인들을 종합하면 소유적 실존 양식은 존재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숙명처럼 갖게 되는 고독과 불안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소유에 매달리면 일시적으로는 쾌락을 얻을 수 있으나, 인간의 자아는 분열되고, 왜곡된다. 그런 자아의 분열과 왜곡은 타인과의 관계도 왜곡시킨다. 소유와 소비에 집착하는 존재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래는 괴테가 쓴 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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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네.
내게 속한 것은 다른 아무것도 없음을. 오로지 나의 영혼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나오려는 사상과, 자애로운 운명이 베풀어준,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향유하는 은총의 순간 순간 뿐임을. -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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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알 수 없는 누군가 의해 던져진 존재로서의 실존적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과 외적 조건을 의식하면서 삶의 의미의 토대가 되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세상과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말한다. 자연과 대립하지 않고 사람과 대립하지 않아야 한다.
소유적 실존양식을 사는 사람은 던져진 존재로서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소유에 집착한다. 더 많이 갖기를 원하고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연과 사람 간의 갈등,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을 사는 사람은 던져진 존재로서의 실존적 불안을 인정하며, 기꺼이 삶의 모순을 받아들이며,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과 외적 조건을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능동적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세상과 대립하지 않는 삶이다. 즉 존재적 실존양식을 살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능동적 자세 그리고 타인과의 연대와 사랑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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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삶에 대한 능동적 자세 - Objective Ac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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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강신주는 어떤 언론사가 주최한 강의에서 맑스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라는 책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맑스는 인간의 삶을 '대상적 활동'(objective activity)으로 이해하였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인간은 인간의 능력으로 통제하기 힘든 외적 조건과 환경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주어진 조건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삶이 곧 인간의 삶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말을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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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적 활동'에서 '대상'은 영어로는 object입니다. 'object'란 어원적으로 '내 앞(ob)'에 '던저져(ject)'서 나의 활동을 막는 것을 의미하죠. 내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대상'인 셈입니다. '대상'이 나를 둘러싼 현실적인 제약이나 조건이라면 '활동'은 내가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신에게 저항적인 현실조건에 대해 활동하는 '대상적 활동'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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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삶의 과정은 크게 보면 생로병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겪는 필연적인 제약이다. 동물도 인간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겪는다. 그럼에도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주어진 조건과 현실적인 제약을 직시하면서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주체라는 것이다. 강신주가 든 사례를 살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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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에서 수영하는 사람을 상상해봅시다. 분명 그에게는 어떤 방향으로 일정하게 흐르는 물이 존재합니다. 물이 흐르는 힘에 사람은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물의 흐름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능동적으로 수영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인 존재'라는 얘기지요. 마르크스 철학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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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능동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했다. 노동은 인간의 능동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인간의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발현이라고 했다. 인간의 삶은 불확실하다. 정해진 것은 없다. 이런 삶의 조건은 한편으로는 불안을 초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능동성 발휘의 영역이기도 하다. 즉 자유로운 선택과 창조성을 보장한다. 존재적 실존양식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직시하고 실존적 불안을 느끼면서도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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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적 실존양식을 선택한 사람은 타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타인은 나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전락한다.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을 선택한 사람은 타인을 나와 똑같은 존재로 존중한다. 따라서 타인은 나처럼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한다. 마틴 부버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관계의 방식이 존재한다. '나-너'와 '나-그것'의 관계가 그것이다. '나-너'의 관계는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하는 관계로서 쌍방향의 대화가 가능한 관계이다. 반면, '나-그것'의 관계는 타인을 수단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으로 타인은 지배와 복종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일방적인 지시만이 존재하는 관계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은 '나-그것'의 관계와 같다. 이런 관계양식엔 경쟁심, 적대감, 두려움이 존재한다.
요약하면, 존재적 실존양식을 선택한 삶이란 생존에 필요한 기능적 소유를 넘어서는 탐욕적 소유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타인과 연대하고 사랑하면서 그들과 일체감을 이루는 삶의 한 방식이다. 인간은 배고플 때 먹으면 행복하고, 추운 겨울에 따뜻한 옷을 입으면 행복하는 등 육체적 감각의 만족을 추구하는 육체적 혹은 동물적 존재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존재의 내면과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신성한 존재 혹은 영적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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