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의 동사형은 Protest이며, ‘저항하다’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천주교에 저항한 개신교도들을 일컫는다. 이들의 독특한 종교적 교리가 근대 유럽의 합리적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이다.
2. 자본주의 정신!
베버가 말한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이윤추구의 동기가 자본주의 정신일까? 베버는‘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본주의 정신의 요체는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을 갖고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를 말한다. 베버에 의하면 자본주의 정신은 오히려 돈을 벌려는 욕구를 조절하거나 억제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적 상식이 파괴된다.
자본주의 정신이 무엇인가? 그 기원이 어디서 유래하였는가? 와 관련된 논쟁에서 베버의 대척점에 있었던 좀바르트는 자본주의 정신을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로 파악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 정신은 영리욕을 의미했고, 유대인에 의해 발전했다고 주장하였다. 좀바르트에 이런 주장에 대해 베버는 유대교에 의해 발전한 자본주의는 근대 서구의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천민자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천민자본주의란 근대 이전의 중세 시대에 종교나 도덕적으로 비천하게 여겨지던 상업과 금융업으로 먹고 살던 유대인에 발전된 자본주의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돈과 영리 그리고 물질을 궁극적인 추구가치로 설정하였다. 즉, 베버가 말한 근대 유럽의 합리적 자본주의와는 다른 가치를 추구한 자본주의다.
3.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
베버가 말한 근대 유럽의 합리적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영리욕, 이윤 추구 또는 돈을 벌려는 욕구가 아니라 일종의 윤리이자 금욕적 생활양식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금욕적 생활을 하다 보니 많은 돈을 모으는 역설적 결과를 맞이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재산의 무절제한 향락에 맞서 싸웠으며 소비, 특히 사치성 소비를 억압했다. 즉 그들은 돈을 쓰지 않고 벌려고만 했다. 그들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은 금욕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노동을 통한 금욕적 생활양식에 천착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은 벤자민 프랭클린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벤자민 프랭클린을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
베버는 그의 책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쓴 <젊은 상인에 대한 충고>와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힌트>란 두 책에서 프랭클린의 글을 한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직접 인용하였다. 그리고 프랭클린의 글을 단순히 인생을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처세술이 기록된 책이 아니라 독특한 윤리가 제시된 것으로 평가했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에 보면“왜 사람에게서 돈을 짜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그는 잠언의 한 구절로 대답한다. “네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자를 보았느냐. 그 자가 왕 앞에 서리라.”이 구절은 엄격한 칼뱅주의자인 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반복해서 프랭클린에게 교육 시킨 내용이었다. 이 잠언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돈을 번다는 것은 직업상의 유능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런 직업상의 유능함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증표를 뜻한다.
베버에 의하면 프랭클린은 돈 그 자체를 위해 돈을 번 사람이 아니다. 사실 프랭클린은 인쇄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으나, 그의 삶을 보면 실제로 그는 돈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돈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설정하지 않았으며, 직업과 노동 그 자체에 헌신하였다. 왜? 신에게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4. 졸부와 거부의 차이 그리고 영리추구행위의 윤리적 승화
졸부와 거부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전에 강의 중에 교육생에게 물으니 어느 교육생이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라면서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졸부는 땅으로 큰 돈을 번 사람이고, 거부는 땀으로 큰 돈을 번 사람입니다.”그 교육생의 답변에 대해 필자의 생각과 게 다르지 않다고 대답해 주었다. 졸부는 돈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돈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이다. 이들에게 돈을 왜 벌어야 되는가? 라고 물어 보면 그들은 적당한 대답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그냥 돈만 좋아하기 때문이다.
반면, 거부는 돈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돈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들은 그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개신교도인 거부에게 왜 돈을 열심히 버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들은 프랭클린처럼 말할 것이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자를 보았느냐? 그는 왕 앞에 서리라”성경 잠언 구절을 인용하면서 대답할 것이다.
베버는 금전욕은 근대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의 대표적인 신념이 결코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프랭클린 같은 기업가는 졸부 근성이 없었기 때문에 허식과 불필요한 낭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명성도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즉, 프랭클린은 자신이 쌓은 부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를 축적한 이유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동을 수행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유능함을 증명하려는 데 있었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졸부와 거부의 차이는 유대인에 의해 발전한 천민자본주의와 개신교도에 의해 발전한 근대 합리적 자본주의의 차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